건축은 계획으로가 아니라 설계로 진보한다. 설계는 높은 곳에서 내일을 만들고, 계획은 제일 낮은 곳에서 어제를 바라본다. 계획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믿는사람들은 건축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설계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그냥 선을 그린 후, 담배를 입에 물지. 설계를 하는 사람들은 자료집성은 서점에 팔고 있으니, 계획이 할 일은 없다고 말하고 계획을 하는 사람들은 그 문제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와 같아서, 자신이 선택한 것이 바로 '내면의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한다. 때로, 계획과 설계는 의식주의 '주'를 무엇으로 보느냐와 비슷한 관점에서 판가름나는데, 그건 또한 포크숟가락을 포크꽂이와 숟가락 꽂이 중 어디에 꽂아두는가에 비할 수 있겠다. 포크 숟가락은 모양으로는 숟가락에 가깝고 쓰임새는 포크에 가까운데, 이놈을 숟가락꽂이에 꽂는 이는 '집'으로 보고 포크꽂이에 꽂는 사람은 '삶'이라고 보는거지. 그래서 설계가 어느새 집을 다 그리고 사람에 옷을 입혀 밥까지 먹이고 있을 때가 돼서야 계획은 그 사람이 뭘 어디서 조리해서 누구랑 같이 먹는지를 들여다보는 거지.
계획을 하겠다고 붙들고 있으면서 그 무기력함을 느낄 때가 많은데, 문제는 인간의 삶이란 것이, 환경이란 것이, 나쁘다. 더 좋게 하자. 하고 덤벼들어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무엇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가 없고, 누가 누구보다 더 잘 산다고 단정지을 수가 없어서, 8조짜리 단칸방에 고다쯔밑에 발 넣고 자는 청춘이 서쪽으로 손바닥만하게 난 창문으로 남들은 시껍할 저녁 햇살이 그렇게 좋다고 자랑을 하는 걸 두고, 너 참 못산다. 서쪽으론 창을 내는 게 아니다. 고다쯔는 접이형으로 바꾸자고 말할 근거를 찾는 것보다는 상식을 깨는 빛의 사용으로 공간에 깊이를 더하는 서창, 슈퍼휴먼스케일의 고즈넉한 와풍 공간설계,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건축가의 뚝심있는 설계!!!라고 말해버리는게 쉽기도 하거니와.
좋은 건 이미 유럽에 다 있고, 계획은 그 꽁무니를 따라가며, 이건 이래서, 돈이 없어서, 전통이 구려서 등등 사람을 탓하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게 고작일때가 많기때문이다. 의외로 잘 된 사례에는 건축보다 소위 말하는 소프트웨어의 힘이 크고 건축은 그저, 그걸 크게 방해하지 않았음이 증명 될 뿐일 때도 많다.
그런데도 내가 계획을 하는 이유는, 그 소프트웨어를 다둘 분야가 딱히 건축 말고는 없다는 데에 있다. 인간이 만든 허점투성이의 건축이, 도시가, 이 환경이, 인간 집단의 '삶'을 담아내는 위대함을 뭐라고 딱히 말하기가 힘들다. 어찌나 그렇게 자기 살 곳들은 잘 찾아서 자알 살고들 있는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는 궁금해서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