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y 29, 2013

출근길. 한 줄로 선 일본인.

장년에 걸쳐 환경심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행동하는지, 왜 유독 자전거는 저곳에 밀집되어 있는지, 왜 저 가게에는 손님이 없는지. 저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저 가구들의 배치는 어떤 메세지를 주려고 하는 것인지, 왜 이 마을은 걷고 싶은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등등...

 lie to me,mentalist,monk 같은 시리즈 물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인가. "모든 사람의 모든 행동에 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약간의 융통성만 발휘한다면, 몇 시간이고 보고 앉아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처음에 일본에 와서 굉장히 이상했던 것은 일본인의 극단적인 (물리적)거리감이었다. 종종 중화권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얼굴을 너무 가까이 들이댄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적어도 그들은 일관성이 있다. 일본인은 영역을 넘나드는 경계선이 명확하게 보이는 타입이다. 공공의 영역에서 그들은 지나치게 멀게 거리를 유지하고 문을 열고 들어선 다음에는 지나치게 친밀하다. 물론, 한국인의 거리감을 표준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개인적인 느낌이다.

그래서 딸 아이가 아직 유모차를 타던 시절 긴자를 걸으면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행인(아마도 일본인)이 벽에 옷을 긁힐 정도로 피해 게걸음으로 우리를 지나쳐가는 장면을 여러번 경험했다. 유모차에게 길을 터주겠다는 극심한 배려인 것은 알겠으나 핵폭탄 옆을 지나 갈 때 아마 그렇게 할 것같은...과한 동작이었다. 공공 영역에서 그들이 유지하고자 하는 거리감의 예가 된다.

일본의 지하철은 기본적으로 조용하다. 전화통화가 금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하철에서는 공공영역에서의 그들의 행동유형이 잘 드러난다. (얼마전 한국에 갔을 때 아이에게 스마트폰으로 만화를 틀어주는 사람이 많은 걸 보고 경악한 일이 있었다. 스피커로 틀어놓고, 그걸 다 같이 보자는 말인가?)

한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본 지하철에도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굳이 분석을 하자면 이것도 일본인들의 극단적인 영역감과 관계가 있다. 공공영역에서 절대로 떠들지 않는 그들이 그룹을 지어 사적영역을 형성하면 과도하게 그들간의 커뮤니티에 몰입하는 것이다. 경계를 그은 다음에는 외부적 요인은 더이상 고려대상이 아니다. 외국에 나온 일본인은 조용한데 일본인들은 시끄럽더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과 연결된다.

지하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디즈니랜드가 있는 마이하마역을 지날 때면 각 나라의 특징이 한 눈에 보인다.(미안하다 구분이 잘 안된다)중화권은 늘 유쾌하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그들은 패밀리다. 지하철도 그 패밀리의 스위트 홈으로 변신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들은 장소에 불문이다. 패밀리는 육체를 둘러싼 버블과 같아서 아마도 그들은 걸음을 걸을 때마다 우주를 짊어지고 옮겨다닌 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부딪히거나 발을 밟아도 노 프라브롬이다. 못지않게 영어권인사들도 패밀리이기는 하다. 어른들은 떠들면서 애들은 조용히 시킨다.(마피아인가?)그 중에서 미국에서 온 젊은 애들은 아마도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필터링이 있었을 것이다. psp를 손에 들고 있거나 이어폰을 끼고 있다. 영국인 프랑스인은 "노老"가 많다. 그들은 속삭이지만 웃음소리는 매우 크다. 결정적으로 일본에 사는 흑형과 놀러온 흑형의 포스는 어떻게 그렇게도 다를까!!!. 일본 물에 "소울"을 잠재우는 성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연구 대상이다. 한국인들은. 어디가나 똑같다. 화장과 선그라스가 튄다. 선그라스를 머리에 꽂는 것도 특징이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근육질이다. 소심하거나 들떠있거나 지도를 열심히 보거나 여자 핸드백을 들었거나.... 오히려 분위기에 맞추려고 하는 특징이 있다면 특징이랄까. 그래도 한 눈에 다 보인다. 숨지 말자.


아침 출근 길에 찍어봤다. 잘 알아볼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이 한 줄로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에스칼레이터도 아닌데 말이다. 공공영역의 일본인들은 이렇게 행동하는 "일본인"을 객관화해서 "일본인"이라고 하며 굉장히 그것에 애착을 갖는다. 한국인들이 "한국인"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며 굉장히 자기 비판적인 것과 대조된다. 길에서 한 줄로 서서 걷는 일본인을 보면서 억압된 사회에서 괴로워하는 일본인을 보는 지, 선진화된 매너를 지키는 배려를 보는 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아마도 한국인들은 한국이 문文의 나라인 것에 비해 무武의 나라 일본에서는 결례가 바로 칼부림으로 이어졌다더라는 식의 해석에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까불다간 찔린다. 조심하자. 현대인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일본에서도 그렇지 않은 한국인의 모습-사회적 틀을 쉽게 깨고 융통성을 발휘하고 다이나믹한-을 동경하는 마음이 한류를 통해 들어난다는 사실이다. 욘사마의 배려에는 경계가 없고 카라에게는 다테마에가 없으니까. "야 좀 그러면 어떠냐" 고 어깨를 툭 치며 솔선수범하는 존재가 일본에게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이 말이 일본이 못한다는 것도 한국이 잘 한다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밝힌다. 평가에는 취미가 없다.)

추가)폐쇄적인 것으로는 둘째라면 서러울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한가지 떠오르는 가설은 이렇다. 한국은 폐쇄적이기 때문에 외국과 부딪히는 곳에서 한국을 발견한다. 외국의 것을 경험하고 나서야 무엇이 한국적인가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일본은 반대다. 남들과 부딪히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일본"을 말한다. 한국인이 내가 볼 때에는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우리"를 가졌다니 거 참 이상한 사고 방식이다.일본인이 "일본인은"이라고 자주 입에 담을 때 지나친 자기애의 표현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 안에는 "나"는 없고 객관화된 "일본"만 있다. 그래서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니라 열도안의 일본인이 참 많다고 느낄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