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조사를 하면서 놀란 것이 하나있다. 젊은 친구들(?)이 일본을 싫어한다. 일본을 싫어하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다. 일본이 싫다고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놀라웠다. 홍대를 조사할 때의 일이다. 홍대의 거리가 점점 도쿄의 거리 모습을 닮아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넌지시 물어본다. 30대의 대답은 대체로 그렇다. 이다. 일본에도 가봤는데, 오랫만에 홍대를 나왔더니 한국도 똑같더라는 것이다. 칭찬이었다. 일본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도시가 재미있어진다는 의미로 그랬다.
그런데 20대 초반은 다르다. 일본이요? 그래요? 아닌데. 가 표준이다. 일식 음식점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자기는 그것도 반대란다. 그리고는 에이, 그건 신촌이죠. 홍대는 안그래요. 란다. 홍대와 신촌을 굳이 구분하는 것도 부외자(部外者)인 나에게는 신선했지만, 어쨌든 부정이다. 어쨌든 그들은 일본이 싫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왜 싫은 지를 묻는다. 대답은 대부분 독도, 위안부로 시작해 볼 것 없는 나라, 우리보다 나은 게 없는 나라...등등으로 이어진다. 잘 모르는 지구상의 많은 나라들이 사실 볼 것도 없고 우리보다 못하다. 결국은 지금도 우리들은 일제시대를 기억하며 칼을 갈고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현재 진행형인 측면도 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때가 되면 뻐꾸기 시계처럼 얼굴을 내밀고 망언을 한다. 다케시마의 날이나 교과서 문제도 잊을 만하면 뉴스에 나온다. 그런데 우리 세대때는 더 심했다. 동해 바다 건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우리 문제였다. 친일파들이 그대로 부를 물려받아 부자가 존경받지 못하는 한국, 정치인 판 검사가 불신의 대상인 이유. 정정당당함이 평가받지 못하고 줄 서고 눈치를 보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의 불합리함은 죄다 일제의 탓이라고들 했다. 일단은 새치기를 해서라도 승자가 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정의가 되는 사회. 당시에는 우리 안에서도 현재 진행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우리는 "10년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국은 일본보다 10년이 뒤쳐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사실은 10년이 아니라 20년이라더라 30년이라더라 하며 채찍질도 받았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아 일본보다 더 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우리 앞에 있는 많은 나라 중에 일본이 있었을 뿐이었다면 또 모를까. 반대로 지금은 일본의 노인네들이 나를 보면 그런 소리를 한다. 쌍팔년도에 한국에 갔었을 때의 한국을 거론해가며, 한국이 이제는 일본을 앞질렀다며 칭찬인지 시기인지 모르겠는 그런 소리를 말이다. 나는 굳이 주어를 한국에서 삼성으로 정정하지는 않지만, 그런 얘기는 진실도 아니거니와 서로 불편하기만 하다.
독립기념관, 독도 홍보, 김치 전쟁. 이정도면 나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혹은 국제법적인 차원에서, 혹은 위안부나 전쟁 보상등의 문제에서 할 수 있는, 또 해야하는 노력들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10대 20대 한국의 젊은 친구들이 묻지 않아도 일본이 싫다고 의사를 표현 하는 것은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은 일본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과 친해져야 하기 때문도 아니고 불쌍해서도 아니다. 일본의 원전 사고 소식이나 단순한 일본의 우동에 대한 칼럼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 등꼴이 오싹하다. 한마디로 정상이 아니다. 어떤 내용인지 무엇을 말하는 지 보지도 않고 일본이 주제이면, 아사다마오가 등장하면 열도의 이야기이기만 하면 언제든 어디든 같은 내용의 험악한 댓글이 달리는 것은 말이다.
김연아가 1등 이다. 1등이 빛나려면 2등이 위대해야 한다. 정준하가 많이 먹기 대회에서 초등부와 겨루어 이겼다는 뉴스는 욕에 가깝다. 일본에게 당한 것이 있으니 갚아줘야 한다거나 그들은 욕먹어도 싸다고 생각하도록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면 지금 한국은 여전히 일제시대다. 오랑캐가 쳐들어와도 싸우기 전에 먼저 밥상을 차려 맞이하던 우리다. 한국인이라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라이벌에게 번번히 날개를 꺽이는 아픔을 먼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헤아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한국인은 한국인 답게 가르쳐야 할 때가 되었다.